보안사ㅣ09.6-9
윤석양 이병 공판 기록.

아담의 곪은 사과

여긴 한강이 가까워. 여기서 죽으면 시체가 한강으로 가게 돼 있어. 흔적이 안 남는다 말이야.”

친구를 팔라는 프락치 공작은 국방의 의무를 지는 사병들을 공작정치의 도구로, 아니 자신의 출세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려던 보안사 요원들의 비열한 인간성 파괴행위였다. 일부는 친구들에게 사실을 고백하고 다 아는 정보를 물어다주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그 좋은 휴가기간에 아무도 만나지 않고, 전화도 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다가 귀대하기도 했고, 일부는 어쩔 수 없이 몇가지 사실이나 이름을 대주고는 평생을 괴로워해야 했다. (중략) 전두환의 보안사는 '순화'의 기준을 단지 교육을 받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렇게 반인륜적인 수준에서 강요했다. 그리고 일부 보안사 요원들은 학생들을 이용하여 출세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프락치 공작을 강요했다.- 한홍구 <녹화 사업을 용서할 수 있는가> 한겨레21, 2002년 8월 1일 78면

전두환 정권은 이러한 법절차를 무시하고, 대학 내에 상주해온 정보요원에 의해 문제학생으로 지목되었으나 법으로 걸 만한 뚜렷한 혐의가 없던 학생, 시위현장에서 붙잡힌 단순가담 학생들을 경찰서로 끌고가 조사한 다음 곧바로 군대에 입영시켰다. 신체검사를 통하여 신체상의 결격사유 학생들마저 문제학생으로 낙인 찍혔ㅇ면 입영시켰으며 입대할 수 없는 가정환경을 가진 학생들도 입영시켰다. 이들 강제징집자들은 '순수학적변동자'라는 붉은 낙인이 신상카드에 찍혀서 군 수사기관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돼 엄청난 고초를 겪었다. - 전재호 <한국민주주의와 학생운동> 조희연 편, (국가폭력, 민주주의 투쟁, 그리고 희생) 함께읽는책,2002 202쪽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도착하자마자 이들 세 기자는 각각 독방에서 옷을 벗긴 채 검은 제복의 젊은이 5-6명으로부터 몽둥이질 발길질등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한참을 폭행당한 후 또 다시 고문실로 끌려가 물고문 전기고문 엘리베이터 구문 등 갖가지 고문을 당하며 심문받았다. 심문내용은 여자문제, 간첩과의 접선 여부, 촌지수수등 연재소설과는 상관없는 것들이었다. 그런 다음 세 기자는 취조실로 끌려가 밤새 얻어맞고 욕설을 들으며 자술서 쓰기를 강요당하는 등 고초를 격다가 70여시간 만이 6월 1일 오후 3시 초죽음이 되어 풀려났다. - 중앙일보사사편찬위원회 편 <중앙일보 삼십년사> 중앙일보, 1995, 351-352쪽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View.html?idxno=18283

윤석양 ㅣ 1990년 보안사 민간인 사찰 폭로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241323_2687.html

http://www.vop.co.kr/A00000081025.html

http://www.kdemocracy.or.kr

http://blog.ohmynews.com/heifetz725/184064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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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1213022001

국정원·국방부·경찰청에 설치된 과거사위원회들이 진실규명 과정에서 핵심 증거자료를 확보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최초로 발굴한 가치 있는 자료들도 적지 않다.


▲ 인권침해, 간첩조작 의혹 등 과거 국가기관에 의한 피해 사실 조사 과정에서 어렵게 확보한 존안자료들이 ‘역사적증거’로 활용되지 못한 채 해당 기관으로 되돌아가고 있다. 사진은 노태우 정권 시절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계획 ‘청명계획’수립을 증명하는 ‘청명계획카드(체포카드)’.

국방부 과거사위는 1989년 4월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계획인 ‘청명계획’ 수립을 증명하는 4권 1380쪽 분량의 관련 문서와 ‘청명계획카드(체포카드)’ 932명분 4900여쪽을 찾아냈다.79년 12·12 당시 정승화 참모총장 연행 이후 주요 지휘관들의 대응 내용을 기록한 ‘12·12 상황일지’,80년 5월21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자위권 발동 주장이 수기(手記)로 적시된 ‘2군사령부 작전지침’ 등도 처음으로 입수했다.

또 과거 ‘블랙리스트’를 활용한 노동자 관리 실태를 보여 주는 국정원 보존문서 ‘해고 도산근로자 위장취업 및 조직색출 와해공작 추진보고(1983.3)’,83년 ‘송씨 일가 간첩사건’ 당시 안기부가 대법원 판사에게 유죄판결 내릴 것을 압박한 ‘간첩 송지섭 사건 상고심 선고공판 및 대책보고(1983.8.24)’ 등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발전위원회’가 찾아낸 의미 있는 문서들도 많다.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전 국정원 발전위 위원은 “각 과거사위가 조사과정에서 확보한 자료들이 원 출처로 되돌아가는 걸 막고, 과거 권력기관이 저지른 과오를 증거할 수 있도록 통합자료관리 방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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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과거사위원회(과거사위) 발표내용

7.25. 동아일보는 “과거사위, 5.18 발포명령권자 못 밝혀”라는 제하에 아래와 같은 내용들을 전했다.

1) 진압군의 무차별 진압 사례 등은 증언과 군내 문서 등을 통해 확인했다.

2) 발포명령권자와 공수부대가 광주지역 관할부대를 무시하고 월권을 행사했다는 부분은 확인하지 못했다.

3) 발포 명령권자에 대해서는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다."고 했다.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하며 유혈진압을 이끌어낸 인물이 누구인지 실체를 규명하는데 실패했다. 광범위한 조사에도 전남도청 앞 발포를 직접 명령한 문서는 발견하지 못했으며 발포 명령계통을 정확하게 설명해줄 진술을 확보할 수 없었다"

4) 2군사령부가 작성한 '광주권 충정작전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과 육군총장 비서실에서 만든 '증언 참고자료'(기무사 보존)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자위권 발동'을 주장했음을 적시하고 있다. 2군사령부가 작성한 문서에는 '전(全) 각하(閣下·전두환):초병에 대해 난동 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명기돼 있다. 회의 장소와 시간이 명기되지 않은 이 문서(수기·手記)에는 주영복 당시 국방장관실에서 열린 이 회의에 주 장관과 이희성 육군총장, 진종채 2군사령관,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 노태우 수도경비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차규헌 육사교장이 참석했다고 적혀 있다.

5) 과거사위는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에 앞서 5월19일과 20일에도 발포가 있었다고 밝혔다. 19일 오후 광주시 계림동 광주고와 계림파출소 사이에서 시위진압에 나선 11공수여단 63대대 작전장교 차모 대위가 시위대의 공격을 받자 M16 소총을 발사, 당시 조대부고 3학년 김영찬 군이 유탄에 총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11공수여단은 상급부대에 보고를 하지 않은 채 발포 사실을 은폐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과거사위는 결론을 냈다.

5월20일 밤에도 광주역에서 경계 중이던 제3공수여단 16대대 정모 중사가 시위대 차량에 깔려 사망하자 최세창 당시 3공수여단장은 M16 실탄을 배부하고 장착을 지시했다. 당시 3공수여단 소속 이모 하사는 과거사위와 면담에서 "지원병력을 막아선 시위대를 향해 발포가 이뤄졌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3공수여단은 발포와 구타 등으로 인한 시위대의 사망을 폭도의 공격에 의한 자체 피해로 왜곡했다.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에는 광주역에서 "가스탄, 화염방사기, M203 유탄발사기 등으로 시위대를 제지했다"고 적혀 있다.

21일에는 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시위대에 밀리자 공수부대 중대장 이상 및 일부 하사관들에게 실탄이 분배됐다. 당시 상황이 다급해지자 안부웅 61대대장은 군법회의에 회부되는 한이 있어도 발포하자고 주장했고 이제원 62대대장은 반대했다고 과거사위는 검찰의 5·18 조사기록을 토대로 밝혔다. 이날 오후 1시경 시위대의 장갑차에 깔려 11공수여단 무전병이 사망하자 계엄군은 도청광장 분수대 앞에서 시위대를 향해 집중 사격을 가했다.

계엄군 가운데 일부는 위협사격을 가했지만 일부는 조준사격을 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광주관광호텔 옥상 등 주변 건물에 저격병을 배치해 시위 주동자나 총기를 휴대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 같은 증언들은 주로 당시 군 관계자들에게서 청취한 증언을 바탕으로 해 자칫 군의 자위권 발동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 지휘권 혼란

5·18 당시 지휘권 문제는 5공 청문회 때도 논란이 됐다. 공수부대가 현지 지휘관인 정웅 31사단장의 통제에서 벗어나 과격진압을 하거나 발포했다는 점이 논란의 핵심이다. 즉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공수부대를 광주에 파견하면서 광주 현지의 소준열 전투교육사 사령관의 명령 계통을 따르지 않도록 하고 자신이 서울과 광주를 왕래하면서 직접 별도의 명령을 내렸지 않느냐는 논란이다.

검찰은 이와 관련해 1995년 수사결과 보고서에서 정 사령관은 '상무충정작전'을 수행할 특공조를 선정하는 데 관여하고 현지 작전통제권자인 소 사령관의 지휘권에 간섭했으나, 이는 지휘권 이원화와 무관하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과거사위는 "2군사령부가 실탄 통제를 지시했지만 전남도청 앞에 주둔한 11공수여단에는 실탄이 분배됐다"며 "이는 상급부대와 공수부대의 보고계통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거사위는 지휘권 혼란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 광주 지원동 미니버스 총격사건

광주시 외곽 봉쇄 지점에서 발생한 계엄군 총격은 여러 차례 있었다. 이 가운데 광주시 동구 지원동 광주~화순 간 15번 국도에서 발생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제11공수 보안반은 '상기 버스에는 남성 15명, 여성 3명이 탑승. 이중 3명 생포(남2, 여1)외 전원 사살. 남성 2명은 중상으로 통합병원에 후송. 홍금숙은 11공수 정보참모 곽모로부터 보안반에 인계'라고 보고했다. 이 보고서는 1989년 청문회 당시 홍금숙 씨의 진술서와 함께 보안사에 존안돼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사라진 것으로 확인됐다.

과거사위는 "이 사건을 외곽 봉쇄작전 도중 발생한 대표적인 민간인 살상 사건으로 판단하고 중점 조사 과제로 선정해 조사활동을 벌였다"며 "그러나 핵심 증인들의 증언과 자료가 일치하지 않고 사후 시신이 수습된 과정에 대해서는 군 관련자들이 면담을 거부해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고 밝혔다.

◇12.12 군사반란 = 전두환을 중심으로 신군부 세력이 자신들을 견제하려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연행한 군사반란이다. 이 사건으로 군의 지휘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반대파 인사들을 구속하거나 강제 전역시켰다.

위원회(과거사위)가 최초 입수한 '12.12 상황일지'(보안사에서 감청기록을 토대로 작성)는 1979년 12월12일~12월13일까지 군 주요 직위자, 주요 부대 및 지휘관들의 통화 내용이 정리돼 있다.

합동수사본부는 처음부터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이건영 3군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등을 연행하려고 계획했으며 최규하 대통령과 노재현 국방장관은 12월13일오전 5시 이에 서명하면서 날짜를 12월12일로 소급해 적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신군부세력은 군인사법을 무시하고 진급했고 상훈법도 무시한 채 12.12 쿠데타에 공을 세운 인사들에게 무더기로 무공훈장을 수여했다.

보안사는 1982년 육사 교수 등을 동원해 12.12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제5공화국 前史'(총 9권, 4천902쪽)를 편찬했다.

◇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 신군부는 권력 장악을 위해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시행하려는 계획을 사전에 수립한 것으로 확인됐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도 '학생시위 대처 방안'에서 4단계(5.17)로 계엄군 투입을계획했다.

5월8일 긴급 계엄위원회 개최 이전에 5월17일 계엄군 투입을 계획했고 실제로 공수부대가 이동했다. 이에 따라 대학의 휴교령과 포고문 발포, 예비검속 등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가 발표됨과 동시에 이뤄졌다.

따라서 학생들의 시위로 사회가 혼란해 이에 대처하려고 군이 나섰다는 신군부의 주장은 `5.17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를 정당화하려는 거짓 주장이다.

신군부는 또 5.17 비상계엄 확대를 위해 북한 남침설을 악용했다. 1980년 5월10일 김영선 중앙정보부 2차장이 5.15∼20일 사이에 북한이 남침할 가능성이 짙다는 `북괴 남침설' 첩보를 일본으로부터 입수,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에게 보고했고 5월12일 국무회의에서는 이를 근거로 대북경계태세 강화를 결정했다.

조사결과, 5월10일 육군본부 정보참모부는 `북괴남침설' 정보는 북한의 일반적 남침 가능성을 제기한 것에 불과하고 첩보의 신빙성이 없다는 내용으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북괴남침설을 악용하는 한편, 국내 시위를 불순분자의 책동으로 규정해 국가위기 상황이라며 5.17 전군주요지휘관 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확대를결의하고 국무회의를 통해 이를 통과시켰다.

신군부 세력은 북한의 남침이 예상되는 위기상황이라고 하면서도 남침에 대비해야 할 군대를 빼서 시위에 대처하기 위해 대학에 배치했다.

◇5.18 광주민주화 운동
1980년대 초반부터 계속된 충정훈련을 통해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대를 불순분자 또는 적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이와 함께 5.18 이후 상부의 강력대처 명령이 과격진압 배경이 됐다.

계엄사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조치와 김대중 전 대통령 연행에 항의하는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불순분자 또는 고정간첩의 책동으로 몰아갔다. 상부의 지시와 현장에유포된 유언비어는 공수부대원들이 시위를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시위대를 적으로 인식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공수부대원들의 과격진압 배경이 됐다.

당시 군수뇌부는 자위권 발동을 논의했다. 5월21일 수기로 작성된 문서에는 `장관실에 주영복 국방장관, 이희성 육군참모총장, 진종채 2군사령관, 전두환 합수본부장,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 차규헌 육사교장. 전(전두환) 각하: 초병에 대해 대해 난동시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돼있다.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먼저 총격을 가했다는 주장을입증할 만한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 같은 날 오후 1시경 계엄군의 발포 후 계엄군에 의한 조준사격이 있었다. 계엄군이 광주관광호텔 옥상으로 올라가 조준경이 달린소총으로 시위대 맨 앞에 주동자를 향해 조준사격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5.21일 발포를 직접 명령한 문서를 발견하지 못했다.

계엄군은 5월23일 광주-화순간 15번 국도에서 미니버스에 총격을 가해 버스에 타고 있던 민간인이 대부분 사망했다. 이후 사망자들의 시신은 수습되지 못한 채 대부분 방치됐고 사망자 가운데 2명의 여성은 대검으로 찔린 흔적(자상)이 발견됐다.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의 지휘권에도 혼란이 있었다. 5월19일 광주시 계림동에서발생한 11공수여단의 발포에 대해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나 31사단은 발포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다음날 광주역 앞에서 일어난 제3공수여단의 발포에 대해 전교사나 31사단도 파악했지만 발포를 막기 위한 추가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 작전통제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5월24일 하루에만 계엄군 간에 두 차례의 오인사격이 발생했다.

신군부는 12.12에 반대했던 군 지휘부들을 강제로 전역시키고 반대로 이에 동조한 세력에 대해서는 군인사법을 무시해가면서 진급시켰다. 신군부는 또 상훈법까지 무시하고 12.12 및 5.18 진압 공로자들에게 훈.포장을 수여했다.

신군부는 5.18을 불순분자들이나 고정간첩들에 의한 계획적인 난동행위로 왜곡했다. 5월24일에는 남파 간첩 이창용(본명 홍종수)를 광주의 시위와 연관시켰다. 5월16일 보성을 통해 침투한 이창용의 수사기록이나 재판기록 어디에도 5.18 관련 임무나 광주로 진입하기 위한 시도는 발견할 수 없었음에도 신군부 세력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과 연관된 것처럼 여론조작을 하기 위해 허위 사실을 유포했다.

5.18 ‘충정명령’은 무차별진압 작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투입된 군 부대가시위대를 무차별적으로 진압한 사실이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 조사결과 드러났다. 과거사위는 작전명 '충정'에 의해 진압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 가운데 작년 12월 기준으로 현역 복무하고 있는 7공수 부대원 9명 중 8명을 집단면담, 과격진압 사례가 있었다는 증언을 청취한 것.

이들은 증언에서 "부대원들은 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자행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는 "시위대의 머리를 때리지는 않았다"면서도 "훈련이나 명령에는 없었지만 흥분된 상태에서 진압봉으로 무차별 구타"한 사실은 인정했다.

당시 11여단 62대대 소속 박모 하사는 연행자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려고 옷을 벗겼다고 진술했다.

5월18일 희생된 김경철씨는 공수부대에 의한 대표적인 과격진압 사례였다.

청각장애로 인해 말까지 할 수 없었던 김씨는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그는 광주 적십자병원으로 후송됐지만 뇌출혈로 이튿날 새벽 결국 사망했다.

5월22일에는 헬기에서 내리는 연행자를 공수부대원이 칼로 찌르는 사례도 있었다.

당시 광주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 전투발전부장 김모씨와 작전참모 백모씨는 "공수부대원이 연행자의 귀 뒷부분을 칼로 찌르는 장면을 목격하고 이를 제지하려 했으나 공수부대원이 대들었다"며 "술 냄새가 났다"고 증언했다.

과거사위는 이 증언이 사실인지를 조사한 결과, 같은 날 광주국군통합병원에 실려온 '전재서'라는 사망자의 사인이 우측 귀 뒷부분의 자상과 총상이라는 것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진압 때 대검사용을 부인했지만, '전교사 작전상황일지'(5.18)에는 '7공수대 총검진압'이라고 적혀있고 안기부에서 1985년 작성한 자료에도 '7공수여단 착검진압'이 명시되어 있다고 과거사위는 전했다.

M16에 대검을 꽂고 시위대를 추격한 사진 속의 인물인 7공수여단 서모 중사는 과거사위의 거듭된 면담조사를 거부했다.

3공수여단의 '전투상보'에는 광주역에서 "가스탄, 화염방사기, M203(유탄발사기) , E-8(연막탄) 발사통 등으로 시위대를 제지했다"고 기록돼 있다.

5월21일 전남도청 앞 발포 후 공수부대원 중 일부는 주변 건물 옥상에서 저격병의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11공수여단 62대대 박모 소령은 "도청 앞 사격이 있은 뒤 주변 건물에 저격병을 배치했다"고 진술했다.

같은 대대 소속 한모 일병은 "광주관광호텔 옥상에 4명이 1조로 편성돼 올라갔으며 사수의 지시에 따라 조준경이 달린 총으로 주동자나 총기를 휴대한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했다"고 증언했다.

과거사위 관계자는 "일부에서 광주 진압작전명을 '화려한 휴가'라고 하는데 어떤 군내 문서에도 그런 명칭은 없다"면서 "내가 보낸 화려한 휴가라는 수기를 쓴 11공수여단 63대대 소속 나모씨에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거절했다"고 말했다.

공수부대원들은 시위를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규정하는 상층부의 인식 및 지침, 악성 유언비어 등으로 과격진압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과거사위는 강조했다.

국군보안사령부는 1990년 당시 민간인을 사찰해 개인카드를 만들었다.


사건 관련 주요 일지


1988. 2.25. 노태우, 제13대 대통령으로 취임(제6공화국 출범)
4.26.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실시(여소야대 국회)
11.18. 국회 ‘광주특위’ 1차 청문회 실시
11.23. 전두환ㆍ이순자 부부 사과문 발표, 설악산 백담사 은둔

1989. 1.21.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출범
3. 1. 전국농민운동연합(전농) 결성
3.20. 노태우 대통령, 중간 평가 유보에 대한 특별담화 발표
3.25. 문익환 목사 방북, ‘통일 논의하러 왔다’는 도착성명 발표
4. 3. 정부, 안기부ㆍ경찰ㆍ검찰ㆍ보안사 등 관계기관 공동으로 공안합동수사본부(공안합수부) 설치, 재야단체에 대한 일제 수색
4.27. 보안사 3처, ‘청명 T/F’ 구성해 ‘청명카드’(체포카드) 작성 시작
5. 3. 부산 동의대 참사사건 발생, 전경 6명 사망(동의대 사태)
5.10. 수배중이던 조선대생 이철규, 변사체로 발견됨(이철규 변사 사건)
5.28.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결성, 위원장 윤영규(전남고 교사)
6.27. 안기부, 간첩 및 밀입북 혐의로 서경원 의원 구속
6.30. 전대협 대표 임수경, 평양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 도착
8.15. 임수경, 문규현 신부와 함께 판문점 통해 귀환 (구속)
중앙대 안성캠퍼스 총학생회장 이내창, 거문도서 변사체로 발견
12.31. 전두환 前 대통령, 국회증언에서 ‘광주ㆍ5공비리’ 관련 모두 부인

1990. 1. 1. 노태우 대통령, ‘5共청산’ 종결 선언
1.22. 민정ㆍ민주ㆍ공화당, 합당 통한 신당창당 선언(3당 합당)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성균관대 수원캠퍼스에서 창립대회
4.21. 대학생ㆍ재야단체 등 3,000여명, 연세대에서 국민연합 결성
5. 1. 윤석양, 군 입대(3사단 훈련소, 6주 신병 교육)
7. 3. 윤석양, 사단 보안부대 연행
7. 4. 보안사, 윤석양 서빙고분실 연행(이○○ 계장, 김○○ 반장)
7.19. 윤석양, 홍익대 앞에서 ‘혁노맹’ 수사 협조(박○○ 검거)
8.22. 보안사, 치안본부:현역군인 10명 포함 ‘혁노맹’ 사건 발표
8.31. 윤석양, 보안사 서빙고분실 ‘분석반’ 작업 협조
9.21. 『말』10월호 ‘혁노맹 조작’ 보도, ‘이중 스파이’ 의심(조기탈출 결심)
9.24. 윤석양, 보안사 서빙고분실 탈출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위 은신
10. 4. 윤석양, ‘민간인 사찰’ 폭로 양심선언(KNCC 인권위 사무실)
- 동향파악 대상자 색인표 1,303장, 개인신상카드 4명(노무현, 문동환, 이강철, 박현채), 개인별 동향파악 내용 입력 컴퓨터 디스켓 30장(447명분) 공개
10. 5. 국방부 대변인, “전시ㆍ계엄령시 적으로부터 보호ㆍ차단 목적” 작성 자료라고 발표
10. 8. 국방부장관(이상훈→이종구), 보안사령관(조남풍→구창회) 경질
10.10. 국방부, ‘보안사 사건 합동조사단’ 구성
10. 이종구 국방부장관, 국회 국방위 1차 보고
- “대민 사찰은 법적근거 없는 월권행위 인정”
10.13. 확대비상시국회의, “보안사 불법사찰 규탄과 군정청산 국민대회” 개최(보라매공원)
10.22. 이종구 국방부장관, 국회 국방위 보고
- 국방부 ‘합동조사단’ 조사결과ㆍ개선방안 보고
- “군 보호 목적, 적 또는 좌익 불순세력 연계 차단하기 위해 신상자료 작성”
11.14. 서울민사지법, “보안사 민간인 사찰 자료” 증거보전 검증
- 서울민사지법 90카94840호 증거보전 신청사건
- KNCC 인권위, 사본은 법원 제출하고 원본은 국방부에 반환
12. 3. 국회 국방위, 국방부(보안사) 국정감사
KNCC 인권위, ’90년도 인권상 수상자로 윤석양 결정

1991. 1. 1. 보안사, 국군기무사령부로 개칭
6.27. ‘보안사 민간인 사찰’ 대상자 148명, 국가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

1992. 9.23. 윤석양, 대구에서 기무사ㆍ헌병대 요원들에 의해 피검
9.24. 윤석양, 군무이탈 혐의로 구속
10.30. 3사단 보통군사법원, 윤석양에게 군무이탈죄 적용 징역 3년 선고

1993. 2. 9. 육군 고등군사법원, 윤석양에게 징역 2년 선고
6. 8. 대법원 형사2부, 윤석양의 상고 기각, 징역 2년 확정
7.29. 윤석양, 육군교도소에서 안양교도소로 이감
9.17. 윤석양, 안양교도소에서 공주교도소로 이감

1994.11. 7. 윤석양, 공주교도소에서 만기 출소

1998. 7.24. 대법원, 사찰 대상자(원고)들에게 각각 200만원 위자료 지급 판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06377
| 2010/05/23 17:08